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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일상 일기 /영화 한편 , 책 한권

태고의 시간들 : 올가토카르추크 장편소설

독서모임에서 읽은 <방랑자들>을 통해 올가 토카르 추크라는 작가를 만났다. 그리고 이 작가의 문체가 매력 있어 한번 더 다른 책으로 작가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 후 만나게 된 책이 <태고의 시간들>이다.

평소 판타지나 신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태고의 시간들의 초반부를 읽으며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계관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세계관 (공간)을 여행할 수 있음에 설레었다. 그러나 독특한 시작에 비해 배경은 점점 더 평범해지고 주변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옆에 밀착되어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태고의 시간들은 제목과는 다르게 아주 먼 과거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태고의 시간들이라는 제목에서 아주 오래된 옛 날, 옛 것의 시간들을 떠올렸는데 의외로 '태고'라는 마을(공간)의 이야기였다. 이 책은 독서모임을 이틀 앞둔 새벽 1시에 모두 읽었다. 바로 자러갈 계획이였는데 여운을 펼쳐놓느라 1시간이 훌쩍 넘었다. 

 

 

마음에 남은 구절

 

16p

천사는 인간과 같은 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유추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생각지도 않는다. 어떤 인간들은 천사를 멍청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천사는 애초에 자기 안에 있는 지혜의 나무에서 따온 열매, 순수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지식은 단순 명료한 직감을 통해서만 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추론과 이에 수반되는 오류, 그 뒤에 찾아오는 온갖 두려움을 제거한 지식이며, 그릇된 인식이 빚어낸 편견을 배제한 지식이다. 

 

43p

더러워진 눈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빨간 장갑은 상속자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뭔가가 변화하고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모든 것은 발전한다는 확고한 믿음, 모든 종류의 낙관주의는 결국 청춘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49P

아버지는 휘청대며 걸어다니다가 밤이 되면 종종 어머니 품에 안겨 흐느껴 울곤 했다. 그래서 미시아는 아버지를 대할 때 자시와 대등한 상대로 여겼다. 그때부터 미시아는 어른이나 아이나 모든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든 어른이든 전부 일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54P

사물은 시간도 움직임도 없는 다른 현실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단지 그 표면만 드러나 있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나머지 속에 물질적 대상의 의미와 본질이 숨겨져 있다. 커피 그라인더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라인더는 '갈아낸다'라는 관념으로부터 도려낸 형상의 조각이다.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74P

미시아는 이 뼈들을 손에 쥐는 것을 좋아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잡는 돼지, 세상의 모든 돼지가 전부 이렇게 같은 모양의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미시아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113P

 

신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잡을 수 없고 끊임없이 변화는 것만이 신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신은 바닷속에 잠겨있다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바위를 통해 자신을 보고, 태양을 사랑하는 식물들을 통해, 그리고 여러 세계의 동물들을 통해 자신을 본다. 인간이 처음 나타나자 신은 계시를 경험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밤과 낮을 가르는 가녀린 선을,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그때부터 신은 인간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서로 다른 수천 개의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가면과 다름없는 그 얼굴들을 마치 배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일순간 가면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입으로 스스로에게 기도하면서 그는 자기 안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거울 속에 비친 상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상 속에 투영되었다.

 

신이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신인가?인간인가? 혹은 신이면서 인간인가, 아니면 신도, 인간 아닌가? 내가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나를 만들어냈는가?"

 

인간이 그를 유혹하자 그는 은밀히 연인의 침대로 들어간다. 거기서 사랑을 발견한다. 노인의 침대로 남몰래 들어가서 무상을 발견한다. 죽어가는 자의 침대로 숨어 들어가서 죽음을 발견한다. 

 

264P

죽음에 대해 학습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 마치 시험처럼 죽음의 과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자들의 시간 속에 갇히게 된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생을 찬미할수록, 생과 더욱 강렬하게 연결될수록 죽은 자들의 시간은 더욱 혼잡해졌고 공동묘지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죽은 자 들은 이 곳에 와서야 '삶이 끝난 후'를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발견은 헛된 것이었다.

 

 

269P

신과 욥 

 

275P

나무의 입장에서 인간은 영원하다. 그들은 고시치니에츠의 길가에서 항상 보리수 그늘 밑을 오가고 있다. 나무가 보기에 그것은 정체도 움직임도 아니다. 인간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 다시 말해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더 것처럼 늘 똑같은 모습으로 비친다.

 

281P

이지도르는 재빨리 두 눈을 깜빡여서 채광창의 액자에서 얼른 그 모습을 좇아 버렸다.

 

308P

랄카의 시간 

동물들의 시간은 언제가 현재형이다.

그러므로 랄카는 현재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미시아가 옷을 차려입고 외출하면, 랄카는 그녀가 영원히 떠나버렸다고 느낀다. 미시아는 일요일마다 영원히 성당에 간다. 감자를 가지러 영원히 지하실로 내려간다. 

 

310P

랄카는 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드문 경우에만 신을 체감하는 인간과 달리, 동물은 끊임없이 신을 인지한다. 랄카는 풀밭에서 신의 향기를 맡는다. 시간이 랄카와 신을 갈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30P

이지도르는 두려움에 떨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영상을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슬픔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영상은 점점 커져서 그의 육신과 영혼을 삼켜버렸다. 

 

352P

이지도르는 실망했다. 노년기가 되면 만물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혜안이 트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353P

죽음이라는 건, 지금껏 이지도르를 형성해왔던 모든 것들이 체계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이었다. 급속도로 진전되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면서, 자기완성형이면서, 극도로 효과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마치 얼마 전에 양로원에 새로 도입한 정산 시스템에처럼 컴퓨터에서 불필요한 정보가 자동으로 삭제되는 과정과 비슷했다. 

제일 먼저 삭제된 건, 이지도르가 그동안 살면서 힘들게 정립한 이상과 신념, 생각, 추상적 개념들이었다. 

 

 

우리는 삶의 유한함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 책은 태고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태고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고 나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한 사람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을 만나면서 그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관계와 상황들로 사람들의 시간과 의미는 다르게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시간과 사물과 동물과 식물 그리고 공간의 시간흐름을 보면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도 한번 더 일깨워주는 것 같다.